‘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
 
 
 
 
 
호주 빅토리아 주를 방문한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 가운데 하나가 G.O.R이다. 얼마 전 국내 모 CF에서 영화배우 정준호와 장진영이 이 해안도로를 타고 달리는 장면은 보는이의 가슴까지도 상쾌하게 만들었다. 공식적으로는 멜버른에서 75Km 떨어진 질롱(Geelong)에서 시작하여 애들레이드 방향인 넬슨(Nelson)까지의 437Km 구간을 말하지만, 대부분의 관광객은 270Km 지점의 워넘불(Warrnambul)을 이 멋진 드라이브의 종착지로 삼는다.

사실 G.O.R은 단순한 해안도로다. 어떻게 보면 대자연의 조화에 경의를 표하고 한발 더 다가가고자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자연의 너그러움으로 잠시나마 허락하여 주고 있을 뿐이다. 오색으로 물들여 놓은 웅장하게 펼쳐진 녹음과 목초지, 거대한 파도, 그리고 듬성듬성 보이는 작은 마을들이 이 길을 찾는 손님들을 맞는다.
이 도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의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희생된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당시 불어닥친 세계공황을 타개하고자 탄생했다. 기암절벽과 녹림을 가로질러 장장 13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1932년 완공되자마자 그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세계적인 명소로 떠올랐으며, 현재 G.O.R은 세계 4대 해안도로의 반열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하지만 이 길이 생겨나기 200여년 전 이곳에 첫 발을 디딘 영국과 아일랜드의 선원들에게 이곳 바스 해협(Bass Strait)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당시 이곳에 처음 닻을 내리려 했던 영국의 탐험대원과 이민자(범죄자)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2명이었다. 그 둘은 18세 동갑내기인 선원 톰과 소녀 에바였다.

톰은 목숨을 걸고 에바를 구했지만 더 이상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은 아직까지 곳곳에서 공연되고 있다. 물론 이후로도 수많은 난파와 조난이 계속되었다. 이곳의 기상조건은 뱃사람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이 해협에서 사라진 배는 무려 700여척으로, 그중 워넘불과 포트 캠벨 인근에서 가라앉은 배가 163척이다. 이곳에 붙여진 또 하나의 별칭이 ‘난파선의 해안(Shipwreck Coast)’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거센 바람과 거대한 파도,짙은 안개로 새벽녘 상쾌한 남반구의 새벽공기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차량 우측에 달려 있어 어색한 핸들도 이내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받아들인다. 멜버른을 떠나 질롱을 향한다. 동이 터 오고 뿌옇던 새벽안개도 서서히 개면서 우윳빛 공기를 가르고,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선명한 수평선이 드러난다. 짙은 유화를 보는 듯한 새파란 하늘빛깔.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다. 질롱을 지난다. 이곳부터 G.O.R의 시작이다. 20분쯤 달리면 퀸즈 클리프에 도착한다. 이곳은 세계에서 서핑 해변으로 이름난 토키, 벨스, 잔 쥐크 해변이 이어진다. 특히 벨스 해변은 G.O.R의 또 다른 서핑도시인 아폴로 베이와 함께 형사와 은행강도로 열연한 키애누 리브스와 패트릭 스웨지 주연의 서핑 영화 ‘폭풍 속으로’ 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차의 지붕을 연다.

짭짤한 바다 내음이 온몸을 적신다. 아무곳에나 차를 세우고 느껴 보는 대자연의 숨결. 눈앞에 놓인 바다의 수평선은 눈이 시릴 만큼 선명하고, 등 뒤의 대초원은 한없는 지평선을 펼쳐내고 있다. 수평선과 지평선이 만나는 해암절벽의 수직선은 두 선의 경계를 지나 하늘을 향한다. 신들이 연주하는 한 악장의 절정을 느낄 수 있다.

어디에서 운전을 하건 객지에서 차를 모는 것은 일단 피곤한 일이다. 외국어로 된 표지판과 지도를 번갈아 보면서 모든 것을 순간순간 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G.O.R의 드라이브 역시 결코 쉬운 코스는 아니다. 일단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타고 하루종일 달리다 보면 코스 자체의 어려움은 둘째 치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야생동물들의 위협 아닌 위협에 급브레이크를 밟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도로 곳곳에는 ‘야생동물 출몰 지역’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호주의 야생동물은 세계 어느 나라의 야생동물보다 호강을 누리고 있다. 필자가 어디에선가 본 한 푯말이 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지구는 인간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라는…
멜버른을 출발한 지 4시간째. 드디어 G.O.R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12사도(Twelve Apostles)’가 눈앞에 나타난다. 2,500만 년을 살고 있는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들이 마치 예수의 12제자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멸과 생성의 부조화가 빚어낸 자연의 신비로움이 장관을 이룬다. 해암절벽에서 떨어져 바다 속 한가운데를 뚫고 하늘로 치솟은 12사도의 웅장함에 멋지다, 경이롭다, 아름답다 등의 경박하고 한정된 그 어떠한 형용사도 어울리지 않을 듯싶다.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숨이 멎는다. 조물주의 교향곡에 청중의 자세로 감히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는 신비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그저 감탄만 연발할 뿐이다.
‘12사도’에서 서쪽 방향으로 차로 몇 분 거리에 위치한 ‘로치 아드(Loch Ard)’ 협곡은 1878년 ‘로치 아드’호가 난파된 곳이다. 절곡처럼 내륙 쪽으로 깊숙이 파인 이곳은 작은 만을 형성하고 있다. 도로에서 봤을 때는 전혀 알 수 없는 형태지만 계단을 따라 안쪽으로 내려가 보면 천연 요새와도 같이 파여 수줍은 소녀처럼 외부인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만 가장 안쪽에 펼쳐져 있는 백사의 상앗빛 모래는 G.O.R을 즐기는 관광객에게 휴식의 즐거움을 선사하며 발걸음을 잡아끈다. 이 협곡은 고운 모래알, 낮은 수면과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

그리고 협곡의 깊이만큼이나 다양한 천연의 크고 작은 동굴들로 또 하나의 별천지를 만들어낸다. 로치 아드 협곡을 지나 발걸음을 재촉해 서쪽으로 좀더 내려가면 피터버러(Peterborough)라는 도시 못미쳐서 ‘런던 브리지’가 나온다. 런던 템스강의 아치형 브리지인 그것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G.O.R의 런던 브리지(London Bridge)는 수천만 년 동안의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불가사의한 아치 모양의 다리 형태를 이루어 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는 새로운 이름을 찾아야 할 듯싶다. 몇 해 전 아치를 이루던 윗부분이 무너져 내리면서 이름에 걸맞은 다리 모양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양쪽 아치를 지탱하던 두 기둥만 버티고 서서 시린 파도와 함께 수천만 년의 역사 숨결을 고스란히 토해내고 있다. 현재는 아치가 무너지기 이전의 사진들만 관광객용 엽서에 담겨 그 명맥을 유지하며 과거의 희소가치를 더한다.

해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어느덧 실질적인 G.O.R의 종착지인 워넘불에 도착한다. 워넘불의 중심가에서 동남쪽으로 2km에 있는 `‘로건스 비치(Logan’s Beach)’에는 매년 7월에서 10월 사이 `‘서던 라이트 웨일스’(Southern Right Whales)라는 고래가 출몰하기도 한다. 이곳부터 애들레이드까지의 길에서는 비취빛 해안과 국립공원의 대초원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또 다른 신비로움을 만나게 된다. 타워 힐 주립공원에서는 호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대초원을 만끽할 수 있다. 또 케이프 브리지 워터와 비치포트에서는 에메랄드빛의 잔잔한 해수면, 여느 G.O.R의 그것과 달리 잔잔히 다가와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거품,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는 바닷속 쪽빛 향연을 만날 수 있다. 블루 레이크는 이름 그대로 호수 전체가 환상적인 푸른빛을 연출해 낸다.

이곳에서 파는 1리터짜리 페트병의 호숫물은 그야말로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다. 애들레이드 힐에 다다르면 과거 원주민인 애버리지니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머레이 강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한마디로 압권이다. G.O.R은 멜버른이나 애들레이드 양방향에서 관광이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광객은 하이라이트가 모여 있는 멜버른에서 워넘불까지의 코스를 전부로 생각한다. 어느 쪽에서 시작하건 이틀 정도의 시간을 갖고 여유 있게 달리다 보면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의 신비에 흠뻑 매료되어 한없이 늘어지는 여행길의 여유로움을 맛볼 수 있다.

대지와 천공의 신들이 펼쳐낸 절대 미학인 ‘그레이트 오션 로드’. 핸들을 돌릴 때마다 전혀 새로운 자태를 뿜어내는 그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날이 저문다. 고요가 깃들면 하늘을 보자. 상큼한 푸른빛 공기가 물결치는 지평선 맞닿은 대지 한가운데에 홀로 서서 남반구의 십자성을 에워싸고 있는 별빛 속으로 파묻히는 기분은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멋진 이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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